高麗神社 고려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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埼玉県日高ひだか市にある高麗こま神社じんじゃに約一年ぶりに行った。前回は韓国人の友人と電車で、今回は日本人のMTB仲間と自転車で行った。僕の自宅から往復100kmを超える。炎天下でもあり、かなりきつかった。

高麗神社と書いて日本ではコマ神社と読む。高麗(コマ)は駒(こま)に通じる。高麗という漢字を日本ではコマあるいはコウライと読ませ、韓国や北朝鮮では고려[コリョ]としか読めない。コリョ神社シンサと読むだろう。

この高麗神社には高句麗神社という名もあるが、句という字は小さく遠慮がちに書かれている(下の写真[3]参照)、高句麗という漢字を日本ではコウクリと読ませ、韓国や北朝鮮では고구려[コグリョ]と読む。

この神社には日本の皇室と李垠殿下(1897-1970)ほかが参拝している(下の写真[12]参照)。注目されるのは1940年代における朝鮮王朝の末裔と1976年の浩宮皇太子(令和天皇)ならびに2017年の平成天皇皇后両陛下である。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있는 고마 신사에 약 1년 만에 다녀왔다. 지난번에는 한국인 친구와 전철로, 이번에는 일본인 MTB 동료와 자전거로 갔다. 내 집에서 왕복 100km가 넘는 거리다. 무더운 날씨에 꽤 힘들었다.

高麗神社는 일본에서는 고마진쟈라고 읽는다. 고려(高麗)는 고마(駒)로 통한다. 高麗(고려)라는 한자를 일본에서는 고마 또는 고라이로 읽게 하고, 한국이나 북한에서는 고려[高麗]라고 읽으며, 고마라고 읽을 수 없다. 고려신사(高麗神社)라고 읽는다.

이 고려신사에는 고구리라는 이름도 있는데, 구라는 글자가 작고 조심스럽게 쓰여 있으며(아래 사진[3] 참조), 고구리라는 한자를 일본에서는 고구리(高句麗)라고 읽게 하고, 한국이나 북한에서는 고구려(高句麗)라고 읽는다.

이 신사에는 일본 황실과 이은전하(1897-1970) 등이 참배하고 있다(아래 사진[12] 참조). 제가 주목하는 것은 1940년대 조선왕조 후예와 1976년 히로노미야 황태자(현 일왕) 및 2017년 헤이세이 일왕과 황후퓨이다.

  • 1942年11月5日
    • 賀陽宮文憲王殿下(李垠の学習院学友)
    • 李沖(不詳)
    • 昌徳宮李王世子玖殿下(李垠の第二子)
  • 1942年11月21日
    • 昌徳宮李王妃方子女王陛下
    • 昌徳宮李王垠殿下
    • 昌徳宮李王世子玖殿下
  • 1943年12月5日
    • 昌徳宮李王妃方子女王陛下
    • 昌徳宮李王世子玖殿下
  • 1976年10月2日
    • 浩宮徳仁親王殿下
  • 2017年9月20日
    • 平成天皇皇后両陛下

The following is the summary quoted from a paper entitled Koma Shrine in modern times written by Sato Atsushi published in 2016. The chronology 1886-1945 related to the Shrine at the end of the paper is also attached herewith.

일본 사이타마현 히다카시(埼玉県日高市)에 고마(高麗) 신사가 있다. 고마(高麗)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신사는 한반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삼국시대 북방의 강국이었던 고구려가 668년에 당나라와 신라 연합군으로 멸망된 후 고구려인 들은 일본으로 망명해 왔다. 716년 당시 조정은 그들을 현재의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이주시켜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했다. 고마군의 리더가 잣코(若光)였다. 잣코(若光)가 돌아가신 후 그를 모신 신사가 세워졌는데 이것이 바로 고마신사의 기원이다. 그리고 잣코의 후손은 대대 신사 궁사(宮司)를 맡고 현재 제 60대 고마 후미야스(高麗文康)씨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고마신사가 알려진 것은 일본이 한반도를 강점한 시기(1910-1945)다. 그 시대 고대의 한반도와 깊이 관련있던 신사의 역사는 일본과 한반도와의 융합, 일체화를 설한 「내선융화(内鮮融和)」「내선일체(内鮮一體)」의 상징으로 되었다.

올해는 고마군(高麗郡)이 세운지 1300년이라는 기념의 해이다. 이에 관련해서 필자는 근대기의 고마신사의 역사를 알고 싶었는데 선행연구에서는 단편적인 언급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신사가 1930년대에 간행한 자료나 당시의 일본, 한국의 신문기사를 조사하고 신사의 역사를 재현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흐름을 밝혔다. 프인트가 된 시점을 7개 정리한다.

  1. 1886년 내각수사관(内閣修史官)인 시게노 야스쓰구(重野安繹)가 고마가(高麗家) 계도(系図)를 조사했다. 이로써 산사의 역사적인 중요성이 밝혀젔다.
  2. 1900년에는 대한제국에서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조중응(趙重應)이 신사를 방문하여 당시의 고마가(高麗家) 당주 오키마루(興丸)와 교류를맺었다.
  3. 1920년대부터 조선총덕부가 실시한 내지시찰단이 신사에 많이 오게 됐다. 이로써 한국 혹은 일본 국내에서도 신사가 알게 됐다.
  4. 1931년에 고마가(高麗家)가 『고마향유래(高麗郷由來)』를 발간했다. 이것은 고마신사의 정사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신사의 관한 지식에 보급에 도움이 됐다.
  5. 1934년에 민간의 후원단체인 고마신사봉창회(高麗神社奉賛會)가 조직됐다. 이로 신사는 더 알리게 되고 그 기부금으로 중수, 확장이 하게 되었다. 또 이쯤부터 신사는 출세명신(出世明神)으로도 알리게 됐다.
  6. 1940년에는 당시 서울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나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내선일체를 위한 종교적 의식이었다.
  7. 1942년에는봉창회의 후원에 위한 새 건물이 완건했다. 그 후 1943년 이우에는 전승기원(戦勝祈願) 등이 거행됐다.

그 역사 속에서 고마가(高麗家)는「내선융화」「내선일체」라는 시대의 흐름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조산이 한반도에서 망명해 왔고 일본에 정주해서 가계를 이어 왔다는 자신에 역사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1945년의 일본 패전과 더불어 한반도의 식민지배는 끝났다. 앞으로 고마신사는 영원히 일본과 한반도의 우호의 가교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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