丸山一彦氏校注の岩波文庫『一茶七番日記』下巻(2003年12月)の「解題」より内容に関する部分を以下に一部編集して引用します。
この『七番日記』の期間すなわち文化7年(48歳)より同15年(56歳)に至る9年間は一茶の句境もようやく円熟の域に達し、また生活面では長い江戸生活を切り上げて故郷柏原に定住し、妻帯して初めて家庭を営むという生涯における最大の転機を迎えた時期にあたる。
이 『칠번일기』의 기간 즉 1810년(48세)부터 1818년(56세)에 이르는 9년간은 잇싸의 시경(句境)도 마침내 원숙의 경지에 달하였으며, 또한 생활면에서는 긴 에도(江戸) 생활을 접고 고향 가시와바라(柏原)에 정착하여 아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가정을 꾸린다는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에 해당한다.
現存本の巻尾に付載してある年次別作句数(利貞の集計による)を示すと次の通りである。[注: 表の作句数の合計は8,067]
현존본의 권말에 부재되어 있는 연차별 작구 수(도시사다의 집계)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주: 표의 작구 수 합계는 8,067]
| 年次 | 西暦** | 作句数 |
|---|---|---|
| 文化7 | 1810 | 752 |
| 文化8 | 1811 | 472 |
| 文化9 | 1812 | 1,080 |
| 文化10 | 1813 | 1,173 |
| 文化11 | 1814 | 998 |
| 文化12 | 1815 | 834 |
| 文化13 | 1816 | 854 |
| 文化14 | 1817 | 975 |
| 文化15 | 1818 | 901 |
| (寛政*・文化6) | — | (28) |
| *1789-1801 | **概ね | 計 8,074 |
数字の細部に整合しない点もあるが、これによると9年間の総句数は8千句を超え年間平均9百句に迫る勢いである。あたかも長い間貯えられた水流が堰を切って一気に溢れ出たような観があり、句法も自在さと円熟味を加え、まさしくこの期間は一茶の作句活動の最盛期を示すものと言ってよい。
숫자의 세부 사항에 부합하지 않는 점도 있지만, 이에 따르면 9년간의 총 구수는 8천 구를 넘어서 연간 평균 9백 구에 육박하는 기세이다. 마치 오랜 시간 쌓여 있던 물줄기가 둑을 터뜨리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한 느낌이 있으며, 구법도 자유로움과 원숙미를 더해, 바로 이 시기가 잇싸의 작구 활동의 전성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これまでの一茶の生活をふり返ると、享和元(1801)年5月一茶39歳の時、父弥五兵衛は家産を一茶と弟仙六に折半譲渡するという遺言を残して死んだ。江戸俳壇ではついに業俳[職業俳諧師]として一家を成すに至らなかった一茶は、この父の遺言を頼りに郷里に安住の地を求めて骨肉の抗争を続けること十数年に及んだ。そして、文化10(1813)年1月亡父13回忌の折に菩提寺の明専寺住職の調停によって和解が成立し、翌11年2月より生家を弟と折半して住むようになる…
지금까지의 잇싸의 삶을 되돌아보면, 1801년 5월 잇사 39세 때, 아버지 야고베는 가산을 잇싸와 동생 센로쿠에게 반반씩 양도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에도 하이단(俳壇)에서는 결국 직업 하이카이시(業俳)로서 일가를 이루지 못한 잇싸는 이 아버지의 유언을 의지해 고향에 안주할 땅을 찾아 혈육 간의 다툼을 계속한 지 십수 년에 이르렀다. 그리고 1813년 1월, 돌아가신 아버지의 13주기 제사 때 보리사인 명전사(明専寺) 주지의 중재로 화해가 성사되어 이듬해 1814년 2월부터 생가를 동생과 반반씩 나누어 살게 되었다.. .
最初の妻菊を迎えたのは文化11年4月52歳の時であり、菊女との間に三男一女をもうけたが、生まれた子はあいついで夭折する。『七番日記』は長男千太郎の死と長女サトの生誕までを記しているが、さらに文政6年には10年間連れ添った妻にも先立たれるという度重なる不幸に見舞われるのである。
첫 아내 기쿠(菊)를 맞이한 것은 1814년 4월, 52세 때였으며, 기쿠와의 사이에서 삼남일녀를 두었으나 태어난 아이들은 잇따라 요절한다. 『칠번일기』는 장남 센타로의 죽음과 장녀 사토의 탄생까지를 기록하고 있으나, 더 나아가 1823년에는 10년간 함께한 아내마저 먼저 떠나보내는 등 잇따른 불행을 겪게 된다.
江戸流寓時代には孤独と貧苦を嘆く生活詩人であったが、一家を構えた文化11年以降の一茶の句には妻子への断ちがたい愛執や家庭生活をめぐる悲喜・哀歓がなまなましい肉声を響かせるようになる。
에도 유배 시절에는 고독과 빈곤을 탄식하는 생활 시인이었으나, 가정을 꾸린 1814년 이후의 잇싸의 시에는 아내와 자식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착과 가정 생활을 둘러싼 희비와 애환이 생생한 육성을 울려 퍼지게 된다.
また、日記の諸所に見える俳文や記事は当時の世相を反映して人殺し・行倒れ・密通・火災・水害・盗難・橫死人などの暗い話題が大半を占める。流浪生活の苦しさを体験して、これらの事象に無関心でいられなかったのであろう。的確な描写で人生の裏面に鋭く迫る筆力は一茶の文体の成熟をよく示している。
또한 일기 곳곳에 보이는 하이쿠와 글들은 당시의 세태를 반영하여 살인·길거리에서 쓰러진 사람·불륜·화재·수해·도난·길거리에서 죽은 사람 등의 어두운 주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방랑 생활의 괴로움을 체험하여, 이러한 사건들에 무관심할 수 없었던 것일 것이다. 정확한 묘사로 인생의 이면에 날카롭게 다가가는 필력은 잇싸의 문체가 성숙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一茶の句風は『文化句帖』(文化1-5年)の頃からその個性や特色を鮮明にし、いわゆる一茶調の原型となるべきものもほぼ出揃ってくるが、それらがさらに洗練と円熟の度を加えるのはこの『七番日記』の時期である。それはまた、一茶の作句活動の最も充実した時期でもあり『七番日記』はいわば脂の乗りきった一茶調の最盛期を代表するものと言えよう。【岩波文庫『一茶七番日記』下巻「解題」より】
잇싸의 구풍은 『문화구첩』(1805-09년) 시절부터 그 개성과 특색을 선명히 드러내며, 이른바 잇싸조의 원형이 될 만한 것들도 거의 갖춰지지만, 그것들이 더욱 세련과 원숙의 정도를 더하는 것은 바로 이 『칠번일기』 시기이다. 이는 또한 잇싸의 작구 활동이 가장 충실했던 시기로『칠번일기』는 말하자면 기름기가 오른 잇싸조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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