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어려운 한일관계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고 복잡하다. 어떤 전문가는 사상 최악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문제에서 최상급 표현을 쓰는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지적인 게으름의 반영, 또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쉽게 동원되는 것이 최상급 표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문세광 사건과 김대중 납치 사건이 있었던 1970년대 중반보다 지금의 한일관계가 더 나쁜가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과연 “그렇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내가 지금의 한일관계가 나쁘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한일관계는 분명히 나쁘다. 그런데 나쁜 것의 내용, 질이 과거와 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어느 일본 학자의 말에 따르면, 그동안 한일 사이에 있었던 역사인식의 갈등은 정치적 수준(나의 생각으로는 ‘수사적 수준’)에서 진행되었었는데, 지난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 노동 판결을 계기로 법률적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나는 이 학자의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한일 갈등이 이전처럼 정치적인 타협으로 풀기가 더욱 어려워졌다고 본다. 왜 한일 갈등이 법적 갈등까지 왔는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그러나 최근의 한일 갈등은 예전과 양태가 다른 것 같다. 예전에는 ‘웃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는 말처럼 정부 사이의 관계가 나빠지면, 일반 국민의 관계도 나빠지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최근은 정부 관계자와 매스컴이 갈등의 전면에 나서고 있지만, 민간 차원에선 별로 그런 모습을 느낄 수 없다. 주위에 있는 여러 사람들의 감촉도 비슷한 것 같다. 나는 이런 현상을 ‘관랭민열(官冷民熱)’로 정의한다. 관이나 매스컴은 치열하게 치고받는데, 일반시민은 담담하거나 오히려 교류가 더욱 활발하다. 실제 한일은 지난해 정부 사이의 갈등 속에서도, 1050만명 이상이 서로 양국을 오고가는 1천만명 교류시대를 열었다.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날까. 여기부터는 나의 가설이다. 첫째,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과의 인식 차이다. 둘째, 상대국을 직접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이다. 셋째, 전문가 집단과 보통 시민 사이의 차이이다. 물론 이 외에도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고, 위의 세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마침, 1월28일 자로 발행된 일본 주간지 <아에라>에 이런 현상을 다룬 기사가 났다. 나의 가설을 모두 만족하는 기사는 아니지만, 한일 갈등의 새 모습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기사라고 본다. 문제를 잘 알아야 해답도 잘 구할 수 있다.
어디서든 문제는 항상 나타난다. 그러나 문제는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문제의 연속적인 풀이 과정이 우리의 삶이고 역사라면, 우리는 좀 더 냉정하고 겸허하게 문제를 마주해야 한다고 본다.